문학 No.38
장석남 지음
문학과지성사
선정과 글. 문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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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옛 노트에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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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하게 눈 멀 듯 눈부신 봄꽃들이 지나간 뒤, 담담히 초록이 깊어지기 시작할 때, 앵두가 익을 무렵인 오월은 장석남 시인의 오래된 시집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을 읽기 적절한 때입니다. 1995년 출간되었으니 시인의 나이 서른 하나에 나온 시집이지요. 아직은 청년이라지만 청춘이라고 스스로 말하기에는 겸연쩍어지는 시기, 잔꽃들이 지워지고 잎새가 진해지기 시작하는 오월과 같은 나이에 책으로 묶여 나온 시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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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 서 있는 자두나무 가지로 만든/ 매운 칼 같은 냄새/ 입에 들어온 설탕 같은 키스들'(네루다, 「청춘」)의 시기를 간신히 지났다고 생각하며 시인은 읊조립니다. '나는 오래된 정원을 하나 가지고 있지/ 삶을 상처라고 가르치는 정원은/ 밤낮없이 빛으로 낭자했어 [...] 몸이 아프고 아픔은 침묵이 그립고/ 내 오래된 정원은 침묵에 싸여/ 고스란히 다른 세상으로 갔지.' (「오래된 정원」) 그리고 그는 나무 아래 고요한 봄 저녁에 머뭅니다. ’다 저물어서/ 사다리만 빈 사다리로 남겼으면// 봄 저녁‘ (「봄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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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의 미열과 허기를 지나서 이 책의 표제시는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으로 마무리되지요. 숨죽여 고요한 오월 저녁에, 내 안과 밖과 곁에 무엇이 있는지 선명히 느끼고 싶을 때, 시간을 멈추고 시를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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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낸 후 장석남 시인은 박철수 감독의 영화 ‘성철’에서 주인공 성철스님 역을 맡게 됩니다. 직장도 그만두고 연기에 집중했지만 이 영화는 마무리 작업 중 유족과 문도회의 반발을 겪고 끝내 개봉하지 못했습니다. 시인은 이후 영화와 무관한 길을 걷게 되고, 다만 이 영화 촬영을 통해 불자가 되었다고 해요. 다 자랐다고 생각한 후에도 우리는 어디로 흐르게 될 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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